바이든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520억 달러 국내 반도체 산업 육성 투자가 가시권에 돌입했다. 작년 6월 상원 통과에 이어, 1월 25일 하원 법안(America COMPETES Act)이 공개됨에 따라, 美 산업부는 반도체 제조 및 연구개발 투자 등을 위한 세부 정책 수립에 착수했다. 첨단 미래기술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공급 병목현상 타개를 위해 미국 정부는 국제 반도체 생산 경쟁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일각에서 이러한 자국 중심의 반도체 육성 정책이 국제무역 분쟁, 과잉 생산 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바이든 정부의 국내 반도체 투자 정책에 청신호
미국 의회는 미래 경쟁력의 요체인 반도체 산업의 국가 안보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2020년 12월 통과된 '2021년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 : 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의 일부로 반도체 제조업 육성 계획을 명문화했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서 미국의 리더십 회복을 위해 국내 제조업 육성과 연구개발 투자 등 종합 정책을 포괄한 'CHIPS for America Act'가 이렇게 탄생했다.
'CHIPS for America Act'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총 520억 달러 투자를 제안했고, 미국 의회는 즉각 예산 마련을 위해 별도 입법에 돌입했다. 그리고 지난 2021년 6월 상원은 중국의 지정학-경제적 부상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 혁신과 경쟁법'(USICA : U.S. Innovation and Competition Act)을 가결했다. USICA는 국내 반도체 제조, 조립, 테스트, 첨단 패키징 시설 신축 및 현대화 사업에 390억 달러를 배정하는 한편, 연구개발 지원 및 제반 환경 조성 등에 112억 달러 예산을 승인했다. 하지만, 하원에서 법안 논의가 지연됨에 따라 당초 바이든 정부가 목표했던 작년 말까지 통과는 무산되고 말았다.
백악관과 업계는 반도체 투자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의회에 신속한 법안 통과를 촉구해 왔다. 마침내 1월 25일 하원은 상원과 동일한 수준의 반도체 예산을 포함한 'America COMPETES Act' 법안을 공개했다. 백악관과 상무부는 즉각 해당 법안에 대한 지지 성명을 내고 의회의 조속한 처리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원이 발의한 이번 법안은 상원이 가결한 USICA 법안과 협의 조정(conference) 과정을 거쳐 이르면 올해 1분기 중에 최종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현지 언론들은 해당 법안 처리가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으로 전망 중이다. 반도체 투자 조항은 여야 및 상하원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으나, 그 밖에 하원 안에 포함된 무역 관련 조항이 상원과 협상에 암초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현지 통상전문 로펌 관계자는 “하원 안에 포함된 대중 투자 감독 강화, 수입물품 면제한도(De Minimis) 개정, 반덤핑/상계관세 집행 엄격화, 무역특혜제도에서 노동환경 조건 강화 등이 상원 안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상무부, 반도체 육성 예산 배정 계획에 착수
아직까지 의회 예산 승인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는 시점에 상무부는 반도체 산업 육성 예산 520억 달러 배정을 위한 기초 조사에 착수했다. 1월 24일 상무부는 "국방수권법에 포함된 반도체 정책의 효율적인 집행을 위해 업계의 의견을 접수한다”고 공지했다. 관보에 따르면 국내외 반도체 제조사, 유관협회, 기자재 공급사, 교육/연구기관, 반도체 수요기업 및 관련 투자가 등 모든 이해 당사자는 3월 25일까지 'www.regulation.gov' 홈페이지에 접속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상무부는 이번 의견 수렴과 관련해 별도 설명회를 개최하며, 향후 설명회 일정은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 홈페이지(www.nist.gov/semiconductors)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CHIPS for America Act' 예산 통과를 전제로, 상무부는 접수된 의견을 바탕으로 첨단기술 선도, 공급난 해결, 연구개발/제조업 진흥 등을 위한 전략과 그에 따른 예산 배정안을 수립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상무부는 (1) 반도체 금융지원 프로그램, (2) 국립 반도체 기술센터 설립, (3) 첨단 패키징 제조 프로그램, (4) 핵심인재 개발 등 다음 4가지 정책별로 업계의 의견을 구했다.
◦ 반도체 금융지원 프로그램(Semiconductor Financial Assistance Program): 2021년 국방수권법(9902조)에 따라 국내 반도체 제조시설의 설립, 증설, 현대화를 추진하는 민간 또는 공공-민간 합작 사업에 대해 보조금/신용공여 등 금융지원 제공
◦ 국립 반도체 기술센터(National Semiconductor Technology Center): 2021년 국방수권법(9906조)에 따라 NSTC 신설. NSTC는 첨단 반도체 제조 R&D 촉진, 투자기금 조성, 기술상용화 지원, 지재권 보호, 대학-정부 연구소 협업 주관 등 전담
◦ 첨단 패키징 제조 프로그램(Advanced Packaging Manufacturing Program): 첨단 패키징 기술을 통해 제조 생산성, 에너지 효율, 비용 절감 등 국내 반도체 산업 전반에 걸친 혁신 제고
◦ 반도체 산업 분야 인재 개발(Workforce Development Needs of the Industry): 미국 내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위해 민간/공공 영역의 필수 핵심 노동력 육성 프로그램 운영
상무부, 글로벌 반도체 수급 불안정 장기화 전망
작년 9월 미국 정부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 병목현상 해결을 위해 백악관 주재 반도체 대책 회의를 열고 국내외 주요 반도체 기업을 상대로 재고, 판매가격, 고객 등 영업 정보를 요구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1월 25일 상무부는 접수된 160여 개 답변서를 근거로 글로벌 반도체 수급 현황, 중단기 전망, 정부 대응 방안 등을 담은 보고서를 공개했다.
상무부는 해당 보고서에서 △ 2021년 반도체 수요 17% 이상 증가(2019년 대비) △ 수요 기업의 재고보유 일수 2019년 40일에서 2021년에 5일로 축소 △ 특정 품목에서 병목현상 가중 발생 △ 국제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업계 정보의 투명성 필요 △ 국내 반도체 제조역량 강화의 중요성 등을 밝혔다.
또한, 현재 반도체 수급 불균형은 최소 6개월 이상 지속될 것이며, 장기적으로 국내외 상황에 따라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고 내다 봤다. 만약 자연재해 등으로 해외 반도체 생산이 2~3주 차질을 빚는 경우 재고 확보율이 낮은(평균 재고 보유일수 3~5일) 미국 제조업은 조업 중단 등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것으로 전망했다.
상무부는 현재 공급 병목현상이 극심한 제품군으로 △ 반도체 로직칩(의료기기, 자동차 등에 사용) △ 아날로그 칩(전력 관리, 이미지 센서, 전파 장치 등에 사용) △ 광전자 칩(센서, 스위치 등에 사용)을 지목했다. 상무부는 반도체 공급망 조기경보체제(Early Alert System)를 통해 단기적으로 병목현상을 완화하고, 장기적으로는 미국 내 제조업 생산 역량(fab capacity)을 키우는데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글로벌 생산 역량(Global Manufacturing Capacity) 선점에 사활
전미반도체협회(SIA)와 보스톤컨설팅이 공동 발간한 보고서(2020년 9월)에 따르면, 향후 10년 동안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자율주행 등 기술 혁신으로 국제 반도체 수요는 연평균 5%의 가파른 성장이 예상된다. 이런 급격한 수요 증가에 발 맞춰 2030년까지 글로벌 반도체 생산역량(Manufacturing Capacity)은 현재 수준보다 56% 이상 증가(약 1000만wmp)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투자 현황(2020년 6월 기준)을 고려했을 때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필요한 생산역량 증가분 중 50%만이 실제 충족될 것으로 예상된다. 즉, 글로벌 반도체 투자가 급증하는 생산역량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회의 '공백(White Space)'이 생기고 있다고 밝혔다.
SIA는 국제 생산의 '공백'을 선점하기 위해서 미국 정부가 공격적인 반도체 제조업 투자를 서둘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재 투자 수준으로 봤을 때, 미국은 2030년까지 현재 글로벌 생산 '공백' 중 약 6%만을 포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약 500억 달러의 반도체 지원 프로그램이 가동되면 향후 10년 동안 19개의 미국 내 생산시설이 세워지고, 신규 글로벌 생산역량의 24%를 미국이 포착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이로써 국제 반도체 생산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10%에서 13~14%로 증가하게 된다.
현재 반도체 국가 경쟁력 우위 점유를 위한 노력은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2월 8일 EU 집행위원회는 유럽판 반도체 제조업 육성 정책을 공개할 예정이다. EU 유럽 연합 내수정책 집행위원 티에리 브레튼(Thierry Breton)은 “현재 반도체는 모든 국가들에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관심분야이다”라고 밝히며, EU의 반도체 자주권을 위해 미국의 'CHIPS for America Act'에 상응하는 수준의 투자를 제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 경쟁적인 반도체 육성 정책이 국제 무역분쟁이나 과잉생산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카토 연구소(Cato Institute)의 스콧 린시콤(Scott Lincicome) 무역정책 디렉터는 미국이 국내 반도체 산업을 위한 보조금(subsidy) 제도를 사용하면 EU, 중국, 한국 등이 앞다투어 유사한 정책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각국이 상계관세 등 무역구제조치를 경쟁적으로 사용하게 될 경우 반도체 산업이 80, 90년대 당시와 같이 보호무역주의의 진앙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대표적인 자본집약 산업인 반도체 업계에 정책적 투자가 몰리면 반드시 과잉생산에 따른 가격 하락 문제가 표출될 수 밖에 없다”고 신중한 정책을 당부했다.
자료: 美 상무부, Federal Register, 백악관, 전미반도체협회(SIA), 폴리티코 Pro, 파이낸셜타임스, 블룸버그 및 KOTRA 워싱턴 무역관 보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