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나 정부 출연연구소의 정상급 연구·개발(R&D) 기반 기술은 새로운 시장을 여는 퍼스트 무버(First-mover)형이 적지 않다. 하지만, 네이처나 셀·사이언스 등 세계 정상급 학술지에 실리는 연구 결과가 곧바로 세상에 나오는 건 아니다. 그게 바로 현실화한다면, 한국은 진작 다양한 최신 산업분야에서 세계를 이끄는 과학기술 기반 선진국이 됐을 터다. 소규모 실험실 단위에서 성과를 낸 기술이 상용화 단계까지 이어지려면 규모도 커져야 하고, 공정 단계에서 오류도 줄어들어야 한다. 이를 위한 응용기술 개발은 물론 자본투자·시장개척·마케팅 등 필요한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생겨난 말이 소위 ‘R&D 패러독스’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가 세계 1, 2위 수준임에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달 22일 ‘한국의 경제 성장 기적이 끝나간다’라는 내용의 보도를 한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다.
대학 기술과 전문 경영인의 만남
“연구실 기술과 양산 다른 차원”
디스플레이 제작에 초음파 적용
AI로 HBM 오류 찾는 기술 보유
창업 11년 차 벤처기업 크레셈은 이런 ‘한국형 R&D 패러독스’의 장애 요소들을 극복하고 성장 중인 사례다. 창업 때부터 대학의 R&D 기반 혁신기술, 공학을 전공한 전문경영자의 노하우, 공공 펀드의 초기 투자 지원 등 삼박자가 함께 어우러졌다. KAIST 연구부총장을 지낸 백경욱(68) 신소재공학과 명예교수와 노키아 엔지니어 출신의 오상민(52) 대표, 4대 과학기술원이 출자한 기술지주사 미래과학기술지주가 그 주인공이다. 크레셈은 딥테크 벤처기업이다. 초음파를 이용한 ACF 본딩 장비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반도체 패키징 검사 장비가 회사의 주력기술이다. 시작은 ACF 본딩 기술이었다. ACF(Anisotropic Conductive Film)는 전기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필름을 뜻한다. 첨단 디스플레이가 구현되려면 ACF가 반드시 필요하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 2층 둥근 유리 외벽의 투명 디스플레이가 백 교수의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낮엔 투명한 유리 벽으로만 보이지만, 밤엔 디스플레이 역할을 한다.
창업 초기부터 매출 올린 스타트업
오상민 크레셈 대표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본사 1층 공장에서 인공지능을 이용한 반도체 패키징 검사 장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크레셈의 누적투자는 51억원이다. 다른 딥테크 스타트업에 비해 많지 않지만, 초기부터 꾸준히 매출을 일으켜 창업 5년 차인 2018년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지난해 반도체업계의 불황 속에서도 167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연말까지 25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중앙일보 취재진이 인천 송도국제도시 국립인천대 캠퍼스 맞은편에 자리 잡은 크레셈 사옥을 찾아 오상민 대표를 만났다. 8900㎡ 규모 3개 층으로 된 사옥의 1층은 검사장비 등을 만드는 공장으로, 2층은 직원용 골프연습실과 탁구장·당구장·회의실·게스트룸 등의 용도로, 3층은 사무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오 대표는 1층 공장에서 인공지능 칩의 핵심 부품이면서 한국 반도체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떠오르고 있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위한 검사장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정부 R&D 과제 형태로 국책연구기관 및 기업체와 함께 인공지능 기반 HBM 검사장비를 만들고 있다”며 “실리콘웨이퍼 위에 쌓인 HBM용 메모리들의 이상 여부를 특정 파장을 이용해 검사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Q : 창업 때부터 KAIST·미래기술지주와 손을 잡았는데, 어떤 인연인가.
A : “노키아 선행기술 담당 이사로 일하면서 한국 내에 신기술을 찾고 있을 때였다. 2005년 수원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을 때 백 교수를 만나 초음파를 이용한 ACF 본딩 기술에 대해 알게 됐다. 모바일폰 제조에 그 기술을 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첫 인연이다. 이후 노키아를 떠나 검사장비 전문기업 미르기술의 연구소장으로 근무하면서 다시 백 교수와 만났다. 마침 당시 미래창조과학부(현 과기정통부)와 KAIST는 대학 연구의 기술사업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래과학기술지주도 생겨날 즈음이었다. 백 교수와 미래과학기술지주가 참여해 미르기술의 자회사 형태로 크레셈이 시작됐다. 덕분에 미래과학기술지주의 1호 투자기업이 됐다.”
Q : KAIST가 직접 창업할 수도 있는데, 왜 오 대표와 손을 잡았나.
A : “두 번째 만났을 때 백 교수는 이미 ACF 본딩 기술로 창업한 후였지만, 양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검사장비 제조 노하우를 가진 미르기술과 합작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크레셈 창업 이후에도 백 교수의 기술을 스케일업 하고 인증까지 받아내는 데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연구실의 기술이 뛰어나다 해도 양산을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얘기다.”
Q : 기존에도 디스플레이를 위한 ACF 본딩 기술이 있었지 않나.
A : “디스플레이 회사들은 지금까지 열과 압력을 이용한 본딩 방식을 쓰고 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회로 이상이 생기는 경우도 잦다. 백 교수의 기술은 초음파만으로 전기회로 사이에 ACF를 붙이는 방식이라 장점이 많다. 특히 건물 유리외벽용 투명 디스플레이의 경우 겨울엔 영하 20도, 여름엔 영상 70도까지 올라가는 온도를 견뎌야 해 기존 방식으론 어려움이 많다.”
Q : 지금은 검사장비 매출이 더 커졌다.
A : “초음파를 이용한 ACF 본딩 기술은 건물 유리외벽 외에도 다양한 디스플레이에 쓸 수 있다. 다만 관련 대기업의 기존 기술을 대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회사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또 다른 동력으로 반도체 패키징 검사장비 개발에 뛰어들었던 게 반도체 붐을 타고 덩치가 커졌다. 이 또한 기술고문으로 있는 백 교수의 도움이 컸다.”
인공지능 이용한 세계 최초 검사장비
Q : 크레셈의 검사장비 경쟁력은 어디에 있나.
A : “인공지능을 이용한 인라인 검사 장비는 크레셈이 세계 최초다. 여러 대의 검사장비가 자동으로 연결된 구조인데다, 사람의 눈이 아닌 인공지능이 오류를 잡아내는 방식이다. 국내 검사장비 경쟁사들은 검사장비가 종류별로 떨어져 있고, 장비마다 사람이 지켜보는 구조라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든다. 기존 방식으로 60명이 하던 검사를 우리는 단 한 명이 할 수 있다.”
Q : 그만큼 일자리가 없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을 수 있는데.
A :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 지금껏 반도체 장비 검사엔 단순인력이 많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해외에 공장을 두는 회사가 많다. 그렇지만 크레셈의 고객사 중엔 인공지능 검사 장비 덕에 인력을 줄일 수 있어 공장을 다시 한국으로 옮겨온 경우도 있다.”
Q : 그간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A : “직원의 80%가 R&D 인력인데, 중소기업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은 인력을 구하는 게 가장 힘들다. 회사 내에 골프연습실을 비롯한 다양한 복지·편의시설을 갖추고, 증시 상장을 추진하는 이유 중 하나도 좋은 직원을 구하기 위해서다.”
Q : 앞으로 계획은
A : “일단 내년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향후 10년 안에 1조 원대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반도체 검사장비 시장의 키 플레이어로 성장할 거다.”
초기 스타트업들은 뛰어난 기술력이 있더라도 인력과 자금·판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크레셈은 중소·중견기업의 자금·인력·판로를 활용한 조인트 벤처투자 방식의 성공 모델로 평가된다. KAIST와 미래과학기술지주의 투자 1호로, 반도체 검사장비 기업과 대학 R&D기술을 이용한 조인트 벤처 회사로 출발했다.
딥테크 스타트업이 매출을 꾸준히 일으킬 수 있다는 건 뛰어난 장점이다. 한때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중국 시장 매출이 줄었으나, 대신 미국으로 시장을 넓혀가고 있고, 조만간 좋은 소식도 기대하고 있다. 향후 줄어든 중국 시장을 확대하고 대만 시장에서도 인지도를 얻을 수 있으면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리라 판단한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서울대·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R&D에 기반을 둔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